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예상대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p) 낮췄지만, 동시에 내년 추가 인하 속도 조절을 시사하면서 한국은행의 고민이 더 깊어졌다.
탄핵 사태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등 경제 위험 요소를 고려하면 기준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미국의 금리 인하 폭과 속도가 줄어들면 그만큼 '달러 강세-원화 약세' 흐름이 지속될 가능성이 커지고, 한은 입장에서는 금리 인하에 따른 원/달러 환율 급등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한은 금융통화위원들은 내년 1월 13일 통화정책방향 회의 직전까지 환율 흐름과 탄핵 사태에 따른 민간 소비 등 내수 충격 여부를 계속 확인하며 지난달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논쟁을 거칠 것으로 예상된다.
◇ 내년말 연준 금리 전망치 0.5%p↑…'네번 아닌 두번 인하' 시사
연준은 17∼18일(현지시간)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정책금리(기준금리) 목표 범위를 연 4.50∼4.75%에서 연 4.25∼4.50%로 0.25%p 낮췄다.
9월 0.50%p 인하로 피벗(통화정책 전환)에 나선 뒤 11월에 이어 세 차례 연속 금리 하향 조정이다.
하지만 이날 회의 결과의 핵심은 금리 인하 자체보다 크게 바뀐 점도표(FOMC 위원들의 향후 금리 수준 전망을 표시한 도표)다.
새 점도표에 따르면 연준 위원들은 내년 말 기준금리 전망치로 3.9%를 제시했다. 기존 9월 전망치(3.4%)보다 0.5%p나 높아진 것으로, 현재 금리 수준(4.25∼4.50%)을 고려하면 내년에 당초 예상한 네 번이 아니라 두 번 정도만 더 내리겠다는 뜻이다. 2026년 말 기준금리 예상 수준도 2.9%에서 3.4%로 뛰었다.
미국 경기와 고용 흐름이 탄탄하고 물가 재상승 등의 가능성도 있는 만큼, 빠르게 기준금리를 낮출 필요가 없다고 연준이 판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도 "오늘 발표한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서 금리 추가조정 속도를 늦추는 게 적절한 시점에 도달했다는 신호를 보냈다"라고 말했다.
금융시장도 연준의 이런 매파적(통화긴축 선호) 메시지에 곧바로 반응했다. 이날 뉴욕증시에서 다우존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나스닥 지수는 전장보다 각 2.60%, 2.95%, 3.56% 급락했다.
◇ "미국 금리인하 사이클 종료 임박…한은도 속도조절 가능성"
연준이 시장의 예상대로 베이비 컷(0.25%p 인하)을 결정하면서 한국(3.00%)과 미국(4.25∼4.50%)의 금리 차이는 기존 1.75%p에서 1.50%p로 다시 좁혀졌다.
'금리 격차' 측면에서는 일단 한은의 기준금리 추가 인하 여력이 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금리 차이가 줄어 당장은 외국인 자금 유출과 원/달러 환율 상승 압박 수위가 조금이나마 낮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준이 향후 금리 인하 속도 조절을 시사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미국의 금리가 시장의 기대만큼 빠르게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장기적으로 달러 가치가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고, 원/달러 환율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은이 기준금리까지 빠르게 낮추면, 원화 가치 하락과 함께 환율이 더 뛸 가능성이 커진다.
박정우 노무라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연준의 매파적 인하는 한은 금통위의 내년 1월 기준금리 동결을 뒷받침한다"며 "점도표 금리의 상향 조정은 미국의 금리 인하 사이클이 끝나간다는 뜻인 데다, 원/달러 환율 전망도 더 불안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원/달러 환율은 계엄 선포 직후 1.440원대까지 치솟았고 여전히 1,430원대 안팎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은과 정부의 설명처럼, 과거와 달리 현재 우리나라 순대외금융자산이 지난 3분기 기준 약 1조달러에 육박하고 순대외채권국(순대외채권 3천780억달러)인 사실을 고려하면 환율이 일정 수준 오른다고 해도 '외환 위기'로까지 번질 위험은 크지 않다.
하지만 환율 상승으로 어렵게 잡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다시 불안해질 수 있다. 환율이 뛰면 달러 기준으로 같은 가격의 상품이라도 더 많은 원화를 주고 들여와야 하는 만큼, 높아진 수입 물가가 전체 소비자물가를 밀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환율 변동성이 너무 커지면 파생금융상품 등에도 충격이 불가피하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18일 기자 간담회에서 "환율이 1,430원으로 유지될 경우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05%p 정도 오를 것"이라며 "특정 환율 수준을 타깃(목표)하지는 않지만, 변동성이 커질 때 단호하게 완화할 마음이 있다"고 밝혔다.
연말 총량 관리 압박에서 벗어나는 가계대출과 부동산 불안 가능성도 환율과 함께 내년 첫 회의에서 매파 금통위원들의 동결 주장을 뒷받침할 것으로 예상된다.
◇ 국회 등 "탄핵정국 경기부양 위해 1월에도 낮춰야"
하지만 수출 증가세 둔화, 미미한 내수 회복에 탄핵 정국까지 겹쳐 경기가 빠르게 식는 만큼, 한은이 연속 금리 인하로 경기 부양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앞서 17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에서 다수 의원은 이 총재에게 "임시 금융통화위원회라도 열어 기준금리를 선제적으로 인하할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총재는 일단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부인했지만, 전반적 경기 부양 필요성에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는 18일 기자간담회에서 "경기 하방 압력이 큰 상황에서는 가급적 여·야·정이 빨리 합의해 새로운 예산을 발표하는 게 경제 심리에도 좋다"며 "경기를 소폭 부양하는 정도의 재정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FOMC 회의 전 관측이지만, 해외 투자은행(IB)들 사이에서도 한은의 1월 인하 전망이 나왔다.
예를 들어 씨티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은은 계엄 사태에 대응해 안정적 경제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할 것"이라며 "내년 1월 0.25p 추가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총재는 국회의원들의 1월 기준금리 관련 질문에 "한 달 정도 경제 지표를 보고 판단할 것"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저작권자 ⓒ 뉴스 핫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